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시가 나오야 (문단 편집) == 사상 == 시가 나오야는 패전 직후였던 1946년,「국어 문제(國語問題)」라는 글을 통해 [[프랑스어]] 공용화론을 주장한 일이 있다. ||나는 60년 전, 모리 아리노리[* 森有礼. [[메이지 유신]] 이후 초대 문부대신.]가 [[영어]]를 국어로 채용하려고 했던 일을 이 전쟁 중 때때로 떠올렸다. 만약 그것이 실현되었다면 어떠했을까 하고 생각했다. 일본의 문화가 지금보다 월등히 진보되어 있었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다. 그리고, 아마도 이번과 같은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들의 학업도 보다 쉽게 진전되어 있었을 것이며, 학교 생활도 보다 즐겁게 회상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까지 생각했다. 우리들은 [[척관법]]을 모르는 아이들처럼, 낡은 국어를 모른 채 외국어라는 의식 없이 영어를 말하고, 영문을 썼을 것이다. 영어 사전에 없는 일본의 독특한 말도 잔뜩 생겨났을 것이며, [[만요슈]]도 [[겐지모노가타리]]도 그 말에 의해 지금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졌을 것이라는 것까지도 생각할 수 있다. (중략) 거기서 나는 이 경우 일본은 큰 맘을 먹고 세계에서 가장 좋은 언어, 가장 아름다운 언어를 가져와 그대로 국어로 채용하면 어떨까 하고 생각한다. 그러한 언어로는 프랑스어가 가장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60년 전 모리 아리노리가 생각했던 일[* 영어공용화]을 지금이야말로 실현한다면 어떨까. 철저하지 못한 개혁보다도 이것은 옳은 일이다. 모리 아리노리의 시대에는 실현은 곤란했다지만, 지금이라면 실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반대 의견도 여러가지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지금의 국어를 완전한 것으로 고치는 일이 가능하다면 그 이상 바랄 나위가 없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과거에 집착하지 말고 현재 우리들의 감정을 버리고, 100년에 100년 후의 자손을 위하여 결심할 때라고 생각한다. 외국어에 어두운 나는 프랑스어 채용에 자신을 가질 정도로 구체적으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프랑스어를 생각한 것은 프랑스는 문화가 진보한 나라이며, 소설을 읽어봐도 무언가 일본인과 통하는 것이 있다고 생각되며, 프랑스의 시에는 [[와카]], [[하이쿠]] 등의 경지와 공통되는 면이 있다고 언급되고 있으며, 문인들에 의해 때때로 정리된 언어라고도 하며, 그러한 의미로 프랑스어가 가장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나는 모리 아리노리의 영어채용설에서 그 일을 생각하여, 어중간한 개혁으로 몇 년, 몇 십년 동안 불완전한 국어로 잘못되는 것보다는 이 편이 확실하며, 철저한 것이며, 현명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국어의 전환에 대해서 기술적인 면의 일은 내게는 잘 모르는 일이나, 그렇게 곤란하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하고 있다. 교원의 양성이 완료된 때에 소학교 1학년부터, 프랑스어로 전환한다면 좋다고 본다. [[일제강점기|조선어를 일본어로 전환했을 때는 어땠을까.]]|| 모리 아리노리의 [[영어]] 공용화론이 이미 60여년 전 엄청난 비판을 받고 버로우했고[* 그냥 비판 정도가 아니라 영어 공용화론에 반발한 일본의 국수주의자들이 아예 모리 아리노리를 찾아가 칼로 찔러 죽여 버렸다. 이 사건 이후로 일본에서 한동안 영어 공용화론은 자취를 감췄다.], 시가 나오야 자신이 프랑스어를 제대로 아는 것도 아닌 상황에서 막연하게 프랑스어를 받아들이자고 한 이 주장은 당연히 엄청나게 비판받았으며, 시가 나오야를 비판할 때 종종 언급되는 사건이기도 하다. ---- 예술과 사상은 양립할 수 없다는 확고한 생각을 갖고 있었고, 특정 사상이 문학에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부정적으로 여겼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 문학에 대해서는 '주인을 섬기는 문학'[* 프롤레타리아 문학 전반에 강하게 나타나는 특유의 당파성과 사상성을 말한다. 애초에 프롤레타리아 작가들 상당수가 공산당과 깊게 연관된 만큼, 사조 전반에 사상적인 색채가 짙게 드러나는 것이 당연했다.]이라고 표현하면서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이에 대해서는 당시 노동운동가와 학자들이 시가를 찾아와 프롤레타리아주의를 집요하게 밀어붙이는 바람에 이들에게 질려버린 것이 원인이라고 보는 해석도 있다.] 하지만 프롤레타리아 작가들 중 시가가 유일하게 호의적으로 본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게 가공선(蟹工船)'으로 유명한 [[코바야시 타키지]]였다. 편지를 자주 주고받았고[* 코바야시는 학생 시절부터 시가의 소설에 심취했고 편지도 자주 보내곤 했다. 그래서 예전부터 편지를 많이 보냈던 것을 기억한다는 시가의 말을 듣고 얼굴을 붉혔다고.] 코바야시의 초기 작품들도 상당히 많이 읽고 그에 대한 비평을 해주기도 했지만, 두 사람이 만났던 것은 1931년에 코바야시가 나라의 자택을 방문한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코바야시는 2년 후인 1933년에 특별고등경찰에 체포되어 고문 끝에 사망했다.]이었다. 비록 프롤레타리아 문학 자체는 썩 좋아하지 않았지만 시가는 인간적인 면에서 코바야시를 상당히 마음에 들어했다. 자칫 불편하게 받아들여질 수도 있었을 시가의 비평[* 단순히 불편한 정도가 아니라 사실상 코바야시의 문학을 부정하는 뜻에 가까웠다.]에 대해서도 반박이나 비판 없이 겸허하게 수용하는 모습이나, 편지에서 자신의 소설에 대해 아직도 부족한 점이 많다고 언급했던 점 등에서 작가로서 노력하는 성실한 모습을 보고 좋은 인상을 받았던 모양.[* 코바야시에게 보낸 편지에는 게 가공선과 '오르그', '1928년 3월 15일'의 세 작품에 대한 비평이 적혀 있었다. 이 편지에서 시가는 작품의 사실적인 묘사를 높게 평가하는 한편,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어떤 사상을 가지든 그것은 개인의 자유지만 문학이 결코 사상의 선전 도구로 전락해서는 안 되며, 작가는 어디까지나 순수한 예술가여야 한다는 취지의 당부를 담고 있다.] 또한 작가로서의 모습이나 작품의 분위기와는 별개로 순박하고 붙임성 좋은 성품을 보고 상당히 호감을 가졌다고 한다. 이 당시에 대해 시가는 아래와 같이 회상하고 있다. >그는 실로 느긋하게 이야기를 했다. 취미가 전혀 없고 장기도 마작도 할 줄 모른다기에, 할 수 없이 아야메가이케의 유원지[* 1926년 오사카 전기궤도(현재의 [[킨키 일본 철도]]의 전신에 해당)가 설립한 유원지. 2004년 6월 6일에 폐원, 철거되었고 그 자리에는 주택가가 들어서 있다.]에 놀러 갔다. 나는 그 때 아이를 데리고 있었는데, 벚꽃이 피어 있었다.[* 실제로 코바야시가 시가를 방문한 시기는 1931년 11월이었기 때문에, 이 부분은 시가의 기억이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 벚꽃 아래 울타리에 기댄 채, 코바야시 군은 뭔가 활발하게 아이와 놀아주기도 하고, 내게 말을 건네기도 하던 것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 때 험한 일(고문)을 당한 이야기를 하기에 우리 아이는 아직까지 그런 이야기는 전혀 모르지만 아들이 더 크면 이제 코바야시 군은 자주 못 오게 해야겠다고 농담을 했더니,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뭘요, 아드님이 크면 그 때는 더 자주 와서 온 집안에서 마구 뛰어놀 거니까요'라고 응수했다. > >여기에 왔을 때도 내 이야기를 조용히 들으면서 조금도 자기가 먼저 변명을 한다거나 비판을 하거나 하지 않았다. 내가 하는 말을 대부분 긍정하고 있었다. 그 긍정이 나의 입장에서의 긍정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훌륭한 인품이라고 생각했고 완전히 어른이 다 됐다고 느꼈기에, 그때까지 갖고 있던 프롤레타리아 작가라는 이들에 대한 생각을 바꿔 준 사람이었다. 원래 프롤레타리아주의를 비롯해 각종 사상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시가였지만, 사상 문제를 떠나서 코바야시의 예술에 대한 태도와 성실한 모습은 진심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한번은 시가를 사사한 소설가 중 한 명인 오자키 카즈오가 도쿄에서 방탕한 생활과 여자 문제로 고민하다 시가가 살고 있던 나라에서 한동안 머문 적이 있었는데[* 오자키는 여기서도 소설을 쓸 생각은 하지 않고 그저 빈둥빈둥 놀고만 있었다고 한다.], 이 무렵 오자키를 만난 시가는 코바야시가 평소 느긋하게 앉아 글을 쓸 시간이 없어서 전차 안에서 틈틈이 글을 썼다는 이야기와 함께 코바야시를 본받으라는 뉘앙스의 말을 했다고 한다. 이 일에 대해 오자키 카즈오는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온갖 '주의'라는 것들을 싫어하는 선생님(시가)이 코바야시 타키지에게 호의를 갖고 계시다는 사실은 언뜻 모순 같으면서도 그렇지 않다. 그 당시로부터 몇 년 전, 무명 시절의 코바야시가 『창작월간』에 쓴 단편을 읽어보고 '이 사내는 시가 나오야의 소설을 제대로 배웠구나'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던 나로서는 선생님이 먼저 코바야시의 예술을 대하는 마음가짐을 인정하신 것이라고 깨달았기에, 전혀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코바야시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느꼈다. 후에 코바야시가 [[특별고등경찰]]에 체포되어 고문을 받다 사망했을 때는 일기에서 이 사실을 언급하면서 "코바야시 타키지가 2월 20일(내 생일)에 체포되어 경관에게 살해당했다고 한다. 실로 마음이 편치 못하다. 비록 단 한 번밖에 만나지 못했지만 코바야시에게 좋은 감정을 가졌고 그가 마음에 들었건만, 암담한 심경이다"라고 술회하기도 했다. 개인의 일기나 편지조차도 모조리 검열 대상이었던 당시의 사회 분위기를 감안하면 이런 일기를 쓰고도 시가가 무사했던 것은 천운이라고 할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